본문 바로가기
우리나라 역사

백제의 전성기와 멸망

by 짬도이거 2022. 8. 10.
반응형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고구려에서 옮겨 온 사람들이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자리를 잡고 건국한 작은 소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국사기를 통해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 집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석촌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무덤이 고구려 초기의 고분 양식인 돌무지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온조의 백제 건국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해 줍니다.

넓고 기름진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한강과 서해로 이어지는 수로를 통해 중국과도 쉽게 교류할 수 있었던 백제는 다른 국가에 비해 빠르게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백제는 삼국 어느 나라보다 빠른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이르러 백제는 낙랑군과 말갈족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들여온 선진 문물을 바탕으로 정치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백제는 마한의 소국 중 가장 강력했던 목지국을 정복해 한반도 중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견고히 다졌습니다. 이 무렵 백제는 기존의 부족장 세력을 귀족으로 편입시키며 중앙에는 여섯 개의 좌평을, 그 아래에는 16품을 두는 관등제를 마련했습니다. 그러고는 관리의 서열을 옷 색깔로 나타내는 관복제를 실시했습니다. 백제는 고이왕의 업적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닦고 고구려보다 약 100년이나 앞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4세기 후반에 백제는 삼국 중에서 제일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전성기를 이끈 왕이 바로 근초고왕이었습니다. 근초고왕은 마한의 남은 영토를 정복해 지금의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고 남해안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남동쪽으로는 가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낙동강 유역의 소국들을 정복해 영향력을 확보했습니다. 이어 북쪽으로는 지금의 황해도 지역 일부를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근초고왕 때 백제가 차지한 영토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그리고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에 이를 만큼 엄청났습니다. 근초고왕의 대외활동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교역로를 통해 중국의 랴오시 지역과 산둥지역, 왜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근초고왕은 또한 정복을 통해 마련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했습니다. 박사 고흥에게 명해 라는 역사책도 편찬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근초고왕의 노력 덕분에 백제는 한동안 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5세기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추진한 남하 정책은 삼국의 정세에 일대 변화를 안겨주게 되고 백제의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자 황급히 아들 문주를 신라로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은 이미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수도를 포함해 한강 유역을 빼앗겼고, 수천 명의 백성은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개로왕은 전사했습니다. 이후 백제는 남은 세력들을 모아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미 백제 왕실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고 국력 역시 쇠락하고 말았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한 동성왕은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라 왕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6세기 초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국교를 맺고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힘쓰고 지방의 중요 지역인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지방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백제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본격적인 중흥 정책을 펼친 것은 6세기 중반, 성왕 때였습니다. 성왕은 오늘날의 부여에 해당하는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고쳤습니다.

통치 체제를 정비한 성왕은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의 힘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신라와 연합한 백제는 551년 고구려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553년에 신라가 동맹을 깨뜨리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은 것입니다. 분노한 성왕은 정예병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고 이어 자신도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국경 지역에 있는 관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게 잡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왕의 죽음과 함께 백제 중흥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660년 멸망하고 맙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군사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의자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의자왕이 탄현과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적군을 막아야 한다는 신하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대책도 없이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 당나라의 대군은 이미 백강에 상륙한 상태였고,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황산벌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계백 장군이 황산벌로 보내져 신라군을 막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5000명의 백제군이 맞서기에는 신라의 50000 군대는 너무 큰 상대였고 결국 백제의 결사대는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친 신라는 백제의 사비성을 공격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비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반응형

'우리나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의 삼국 통일 이야기  (0) 2022.08.11
고구려vs중국  (0) 2022.08.10
고구려의 시련과 전성기  (0) 2022.08.10
고조선  (0) 2022.08.09
선사시대 생활  (0) 2022.08.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