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초기에 계루부를 포함한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등 총 다섯 개의 부족이 서로 연맹을 맺으며 발전했습니다. 이것을 5부 체제라고 부르는데 각 부족장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가 신라보다 20년 늦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건국 시기와는 달리 가장 먼저 국가의 기틀을 정비한 국가는 고구려입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졸본성은 오늘날 중국의 랴오닝성 환인 부근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졸본성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오녀산에는 아직도 고구려의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오녀산의 오녀산성은 삼국시대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석성이고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력을 높인 성으로 평가받습니다.
유리왕은 기원후 3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졸본성에서 압록강 주변의 국내성으로 옮겼습니다. 압록강 근처는 백두산의 산줄기가 천연의 요새를 만들어 주어 적을 방어하기에 좋고,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에도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제6대 왕으로서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초반까지 고구려를 통치한 태조왕은 왕위에 있으면서 옥저를 정복하고 랴오허강 동쪽 지역에 위치한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는 등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습니다. 흔히 태조라는 이름은 나라를 세운 왕을 뜻하는데, 고구려의 태조왕은 비록 나라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업적을 기려 태조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태조왕이 중앙 집권 국가를 위해 어떤 일을 했냐 하면 태조왕은 계루부의 고씨 출신만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정하여 왕권 안정화에 기여했습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이 왕위에 오르며 고구려의 왕권은 더욱 안정되었습니다. 고국천왕은 부족적 성격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하고 왕위를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꿨습니다. 이는 이전에 비해 왕권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에도 위기와 발전이 반복되는 과도기가 있었는데요.
동천왕이 재위한 3세기 전반기는 고구려의 대외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된 시기였습니다. 즉위 초 공손 씨와 대립 관계가 계속되어 한때 오나라와 연결하려 하기도 했으나 공손 씨의 배후에 위치한 위나라가 화친을 희망해오자 위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238년에는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해 멸망시키는 등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손 씨의 세력이 멸망한 뒤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위와의 긴장이 고조되어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나라 관구검이 환도성에 쳐들어와 성이 함락되었고, 왕기의 추격을 받은 동천왕은 남옥저 방면으로 피신했고 다시 북옥저 지방으로 피난했습니다. 후에 장군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국토를 회복했으나 환도성이 파괴되었으므로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겼습니다.
한차례 큰 위기를 겪은 고구려는 점차 발전해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요동 지방에 대한 공격을 강화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을 공격해 남쪽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4세기 중엽 고국원왕 때에는 다시 큰 위기가 닥치기도 했습니다. 중국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인 국내성이 함락된 데 이어 백제의 공격으로 평양성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큰 힘을 들였습니다. 첫 번째로 중국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들여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의 정신적인 통일을 추구했습니다. 두 번째로 태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세 번째로 율령을 반포해 통치 조직을 정비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발판이 필요하듯 바로 다음 왕인 광개토대왕의 전성기를 위해 소수림왕이 발판을 놓아준 것이죠.
소수림왕이 놓아준 발판을 토대로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바로 광개토대왕인데요. 광개토대왕은 주로 만주의 요동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당시의 요동 지역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요동 지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철기 시대에는 철을 많이 확보하는 국가가 막강한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요동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 마침내 목적을 달성합니다. 이후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토대로 더 넓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제압하고,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해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신라를 도와 가야와 왜를 격퇴하며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을 힘입어 장수왕 때 이르러 427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국내성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해 왕권을 강화하고, 바닷길을 이용해 적극적인 국제 교류를 펼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은 남쪽으로 영토 학장을 계획하고 남하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먼저 백제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키고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했습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최대의 세력범위를 갖게 되었고 그 범위는 요동 지역에서부터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역을 차지한 뒤에 세운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비문에는 고구려를 태왕의 나라로, 신라를 고구려에 복속된 동쪽의 오랑캐로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려 왕이 신라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주었다는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적극적인 영토 확장의 결과 장수왕 말기 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과 만주를 비롯해 한반도 대부분을 차지한 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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