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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1차 갑오개혁과 동학 농민군의 재봉기

by 짬도이거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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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은 뒤 조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스스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군대의 철수를 청나라와 일본에 요청했습니다. 조선 정부의 요청에 청나라와 일본은 공동 철군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조선 정부의 요구에 따라 공동으로 군대를 철수하자고 했지만 일본은 함께 남아 조선을 개혁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급기야 일본은 청나라가 군대를 철수하는 것과 상관없이 조선에 머무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오토리 공사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고종에게 개혁을 제안했습니다. 일본의 강경한 입장에 더 이상 일본을 제어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리훙장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외면했습니다. 다른 열강들도 중재를 포기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위안스카이는 도망치다시피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894년 7월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은 흥선 대원군을 정계로 복귀시켰습니다. 흥선 대원군을 앞세워 청나라에 의존했던 민씨 정권을 몰아내려 한 겁니다. 흥선 대원군은 꿈꾸던 복귀를 이루었지만 꼭두각시 신세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은 후에 흥선 대원군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또다시 실각시켰습니다. 조선의 운명은 순식간에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틀 후인 7월 25일, 일본군은 충남 아산 앞바다에서 청나라의 군함 두 척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일본은 오늘날의 천안 부근인 충남 성환에서 청나라의 육군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리고 8월 1일에야 일본과 청나라는 상대국에 뒤늦은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미 자신감을 상실한 청나라군은 장기전을 유도하며 서양 열강들의 중재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계속해서 청나라군을 압박하며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고자 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조선에 김홍집 내각을 새롭게 수립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군국기무처라는 관청을 세우고 개혁을 수립했습니다. 일본의 관심이 청일 전쟁으로 쏠린 덕분에 조선은 비교적 자주적인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이제 조선에도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3차에 걸쳐 추진되었습니다. 1차 갑오개혁은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 과정에서 나온 요구 사항들을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먼저 정치 부분에서는 궁내부라는 기구를 설치했습니다. 국왕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과 의논해 정책을 결정하는 구조로 변화한 겁니다. 이로써 국왕의 권한은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조선의 기본 행정 구조였던 6조를 더 세분화해 8아문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개국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국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경제 부문에서는 그동안 여러 관청에서 담당하고 있던 세금 업무를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또 당시 서구에서 사용되던 은 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해 화폐를 국제적인 표준에 맞추려는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금납화해 돈으로만 세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부문에서는 획기적인 내용의 개혁이 많이 추진되었습니다. 조선 사회의 통치 기반이었던 신분 제도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고 공식적으로 노비 제도를 없애, 공노비를 해방한 지 100여 년 만에 모든 노비가 일반민이 되었습니다.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유지되어 오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관습들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남녀의 조혼을 모두 금하고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가 되어야만 결혼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습니다. 또 과부의 재가도 허용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부문에서 개혁을 추진했던 1차 갑오개혁은 이전의 조선 사회보다 진일보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중 사회 부문에서 가장 큰 개혁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방대한 내용의 개혁을 모두 시행하기에는 조선의 대내외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회 부문의 개혁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차 갑오개혁이 시행되고 있을 때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며 청나라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1894년 9월에는 일본 육군과 해군이 각각 평양성과 황해에서 청나라군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다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이 '반침략'을 외치며 국가를 구하기 위해 다시 일어섰습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동학 농민군이 봉기했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 점령당한 경복궁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주를 함락하며 기세를 올리는 한편, 각 지역에서 관청을 습격하고 일본군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에 전쟁에 한창이던 일본은 군대의 일부를 남하시켜 조선의 관군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압박했습니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났는데, 정작 조선의 관군과 싸워야 하는 현실에 처하자 전봉준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 주력 부대는 11월 무렵부터 한 달 가까이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서 벌어졌던 격전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전봉준은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재기를 노렸지만 거듭된 전투에서 계속 패배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전봉준의 목에 수많은 현상금과 관직을 걸었습니다. 결국 1894년 12월 어느 날, 전봉준은 한 농민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4월에 전봉준은 서울로 호송되어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봉준의 사형 집행을 결정한 최고 책임자가 당시 법무대신 서광범이라는 사실입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광범과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끌던 전봉준, 두 사람 모두 조선을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한 사람은 사형을 언도하고, 또 한 사람은 사형당해야만 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전봉준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동학 농민군들은 이후 조선 말기의 대규모 항일 의병 활동에 참여해 사회를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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