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라는 극단적인 두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후 조선 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청나라가 두 사건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주면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커진 것입니다.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백성들 사이에 급격히 퍼져나간 종교가 있었는데, 바로 동학이었습니다. 동학은 1860년에 최제우가 세상과 백성을 구원하려는 뜻을 품고 창시한 민족 종교로, 민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1864년, 동학의 급격한 교세 확장에 놀란 조선 정부는 교조인 최제우를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이라는 죄명으로 처형했습니다.
농민들은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자 1880년대 후반, 전국에서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민씨 일가의 부패가 조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데다 삼정의 문란까지 다시금 고개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동학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동학의 교세는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동학의 교세 회복은 1890년대에 일어난 민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이 동학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학의 교세는 정부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습니다.
1892년 공주와 삼례 지역에 수많은 동학도가 모여 교조 신원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과 포교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1893년에는 약 40여 명의 동학 대표가 한양으로 상경해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복합 상소 운동을 벌였습니다. 수천, 수만의 동학도가 서울로 몰려든다는 소문이 한양에 퍼지면서 조선에 와 있던 각국의 외교관들은 무척 불안해했습니다. 동학 대표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듣고 나서야 물러났습니다.
1894년 2월, 전봉준과 농민 1000여 명은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했습니다. 봉기의 이유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문현이 조병갑의 처벌을 정부에 건의했고,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농민들에게 일방적으로 고부 민란의 책임을 전가하고 동학도를 집중적으로 탄압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이용태는 훗날 '한일 병합'에 협조해 남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친일파가 됩니다.
한편 이용태의 행태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고부 근방인 백산에서 또다시 농민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여기에는 동학도들은 물론, 이웃 마을의 백성들까지 합세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던지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말은 당시 모였던 농민들이 대부분 흰 옷을 입고 대나무 칼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서면 하얀 산이, 앉으면 대나무 산이 된다 해서 생겨난 표현입니다. 봉기에 참여한 농민군들은 비록 많이 배운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엄격한 규율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들을 몰아 없앤다.
-농민군 4대 행동 강령-
백산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고부와 태인, 정읍, 고창 등의 여러 고을을 점령했습니다. 황토현에서는 관군들을 무찌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장성의 황룡강 근처에서 관군을 또다시 격퇴하고 전라도의 감영이 있던 전주성까지 점령했습니다. 이제 동학 농민군들은 한양으로 쳐들어가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전주성이 함락되자 무척 당황한 조선 정부는 결국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군은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조선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충청도 아산만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 것입니다. 조선과 맺은 제물포 조약을 핑계로 군대를 파견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청나라에 이 사실을 통보한 뒤 일본군은 처음부터 한성과 가까운 제물포에 상륙해 조선의 수도를 목표로 진군했습니다.
한편 전주성을 지키던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일진일퇴의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승리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파견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전봉준은 결국 정부에 폐정 개혁안을 포함한 휴전안을 제시했습니다. 조선 정부도 전라도 감찰사 김학진에게 전권을 주어 사태를 신속히 수습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전봉준은 조선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비운 뒤 해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해산 후 전라도 53개 읍에 자치 기구의 일종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 12개 조를 실천해 나갔습니다.
1.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잊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중히 처벌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행태를 징벌할 것.
5.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앨 것.
7. 젊어서 과부가 된 여성의 재가를 허락할 것.
8. 이름도 없는 잡다한 세금은 모두 폐지할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역과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할 것.
11. 전부터 있던 공사채는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할 것.
-폐정 개혁안 12개 조-
폐정 개혁안 12개 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동학 농민군이 동학 농민 운동을 통해 꿈꾸었던 사회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농민들이 탐관오리와 양반들의 횡포에 엄청난 고통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분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던 농민들의 모습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내내 수탈로 고통받았던 농민들은 이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줄 만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조선에 주둔해 있는 청나라군과 일본군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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