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정은 장면 정부가 수립한 경제 개발 계획을 바탕으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1963년에 들어선 박정희 정부에 의해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는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할 최소한의 자금도 없었습니다. 도로와 항만 시설을 확충하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금이 필요했지만 국내에서는 확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 바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였습니다. 그 대가로 일본이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가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한 상황에서 국교를 정상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1964년 5월 20일, 한·일 굴욕 회담 반대 학생 총연합회의 주관하에 대학생들이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에 모여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장례를 치르고, 관을 들고 장지인 망우리로 행진했습니다. 이를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이라고 부릅니다. 다음은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에서 낭독된 조문의 일부분입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 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 정부가 절망과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멸시키는 데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의 필요성 때문에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 관계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면서 결국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때 청구권 및 경제 협력에 관한 부속 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우리나라에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총 5억 달러 이상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이후에도 경제 개발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한 박정희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베트남 전쟁 중이던 미국이 우리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국군의 현대화를 돕고, 경제 개발에 필요한 도움도 주겠다고 약속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베트남 파병으로 자금을 확보하며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지만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는 등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수많은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산업이 한창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독일 파견은 일종의 인력 수출인 셈이었습니다. 독일에 파견된 노동자들이 낯선 독일 땅에서 어렵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벌어 온 외화는 당시 경제 개발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방법으로 외국에서 끌어온 자금과, 낮은 임금에도 열심히 일한 국민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는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출품도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 발전의 기반이 되는 각종 시설도 계속 확충되어 갔습니다. 1970년에는 경부 고속 국도가 완공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교통의 혁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람과 물자의 수송이 빨라졌습니다. 아마 당시 경제 성장의 1등 공신을 꼽으라면 서울과 부산을 일일생활권으로 연결해 준 경부 고속 국도도 당당히 후보로 꼽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철강 산업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1968년에 설립된 포항 제철(오늘날 포스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항에서 생산해 낸 철강은 우리나라 중화학 공업 발전의 뿌리로써 다각적인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그리고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세계 2위의 철강사로 부상했습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우리나라 모습에 세계는 깜짝 놀랐습니다.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되었던 대한민국이 이렇게 빨리 회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한민국의 발전은 회복 정도가 아니라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외신들은 우리나라의 성장을 가리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멈추고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수출은 계속해서 늘고 1인당 국민 총생산도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가 계속해서 순탄하게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위기도 있었습니다. 1972년 가을부터 전 세계적으로 석유 가격이 크게 뛰었습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석유 가격은 1974년 봄이 되자 1972년 봄과 비교해 무려 다섯 배나 올랐습니다. 이를 1차 석유 파동이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 석유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아랍 지역의 석유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면서 석유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이것은 석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아랍의 여러 국가는 이스라엘과 무력적으로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석유를 생산하는 아랍의 여러 국가가 석유 생산량을 줄이며 미국 등의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공급량이 크게 줄자 석유 가격은 크게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석유 가격이 폭등하자 우리나라의 경제는 큰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1970년대부터 온 힘을 다해 육성하고 있던 중화학 공업은 석유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산업을 일으킬 원동력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대한민국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건설 기업과 노동자들은 아랍 지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아랍 지역은 석유 수출로 부를 축적했지만, 건설을 비롯한 각종 산업 기술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업과 기술자들은 아랍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송유관 건설과 수로 건설 등 각종 건축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뛰어난 건축 기술과 성실성으로 우리나라의 기업과 노동자들은 아랍 지역에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외화로 1970년대 전반기의 석유 파동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경제 발전을 목표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출량이 계속 늘어나 1977년에는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은 1000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매우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1962년에 처음 시작된 이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5년 단위로 계속 연장되었습니다. 제1,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될 당시에 우리나라는 수출 위주의 경공업 발전에 주력했습니다. 덕분에 섬유와 신발, 가발 등을 다루는 경공업 분야에서 수출이 증가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시행된 제3, 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중화학 공업이 집중적으로 육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철강 산업을 비롯해 배를 만드는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 등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에는 중화학 공업의 비중이 경공업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국민 경제의 발전과 국민 생활의 향상에 중점을 두고 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근간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는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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