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민주화 선언이 있고 난 이후 여당과 야당은 합의로 개헌하고 대통령의 임기는 5년 그리고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바뀐 헌법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만 선출하면 됐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야당 내에서 분열이 생겼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후보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야당의 정치인들과 야당을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이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후보 단일화에는 동의했지만 서로 후보가 되겠다는데에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대통령 후보에 나섰습니다.
드디어 1987년 12월 16일에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1971년에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16년 만에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였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투표율도 89퍼센트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민정당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를 위해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많은 국민들이 크게 실망했습니다. 야당 후보 간의 분열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분노하는 국민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비록 국민의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36.6퍼센트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노태우는 엄연히 대통령 직선제에 따라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여러 정부를 거치며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숙해졌습니다. 이와 함께 국민의 기본권이 더욱 확대되었고, 경제와 문화도 발전했습니다.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여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야당의 국회 의원 수가 여당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해진 야당 의원들은 국회 청문회를 열고 5·1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있었던 전두환 신군부의 불법적 행위를 국민들 앞에 공개하려 했습니다. 또한 전두환 정부 시기에 저질러졌던 각종 비리도 찾아내려 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청문회 현장을 생방송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국민의 관심은 뜨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여러 증인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질문 공세를 피해 간 데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사태를 주도했던 노태우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정부를 이끌던 시기였기 때문에 진실을 규명하고 죄인을 처벌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1993년에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원래 야당 중 하나인 민주당의 지도자였는데 1990년에 노태우 대통령과 손을 잡고 민주 자유당이라는 정당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민주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2·12 사태를 일으키고, 5·18 민주화 운동에 계엄군을 투입해 국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세력들이 재판받기도 했습니다. 이때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도 죄를 묻기 위해 법정에 세우고 징역을 받도록 했으나, 후에 국민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사면되었습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문제는 당시 큰 화젯거리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경복궁의 흥례문을 밀어 버리고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지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설치한 최고 식민 통치 기관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조선 총독부 건물은 정부 기관이나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 앞에 이 건물이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판적인 여론이 많았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국민들 대부분은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며 결국 조선 총독부 건물은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비리를 없애기 위해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고위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고, 가명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이용해 금융 거래하지 못하도록 금융 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 부문의 부정부패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정권 말기에 정부와 관련된 여러 가지 비리가 드러나고, 외환 위기 사태가 일어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위기가 발생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정부에 이어 1997년에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야당의 지도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상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여당과 야당이 교체된 최초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경제 회복을 위해 힘쓴 결과, 김대중 정부 시기에 우리나라는 외환 위기를 극복해 냈습니다. 또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해 한반도에 평화로운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2003년에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 정부를 표방하며 권위주릐를 청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와 함께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추진했습니다.
2008년에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여러 정부를 거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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