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남한의 분리 이후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치르라는 유엔 소총회의 결정 이후, 38도선 이남 지역에서는 총선거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총선거의 시기는 그해 5월 10일로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총선거가 치러지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통일 정부 수립을 바라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반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북 정치 협상을 주도했던 김구와 김규식 등은 끝까지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5·10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4월 3일부터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5·10 총선거 실시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앞서 제주도에서는 여섯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파업이 일어났고 미군정이 이를 강경하게 저지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이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겁니다. 이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유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수많은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3월부터 한 달간 1608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948년 5월 10일, 예정대로 총선거가 실시 되었습니다. 논란이 많은 선거였지만,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아주 큰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21세 이상의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는 보통선거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민 혁명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룬 영국 등 유럽의 여러 국가도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국가의 영향으로 전 세계에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보통 선거가 치러진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첫 선거가 보통 선거로 치러졌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5·10 총선거 결과, 총 198명의 국회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원래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선출하기로 했던 200명에서 두 명이 모자라는 수였습니다. 그것은 제주도 두 곳에서 국회 의원을 선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제주도에서는 세 명의 국회 의원을 선출하려고 했으나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에 대한 진압이 계속되면서 총선거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두 곳에서 투표율이 50퍼센트를 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투표율에 상관없이 득표율이 가장 높은 사람이 당선되는 것과 달리 5·10 총선거에서는 투표율이 50퍼센트 이상 되어야 선거 결과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디 때문에 투표율이 50퍼센트를 넘지 못한 제주도 두 곳에서 치러진 선거는 무효로 처리되고 말았습니다.
5·10 총선거를 통해 국회가 구성되면서 5월 31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국회에는 이후 우리나라에서 구성된 여타 국회와는 다른 제헌 국회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제헌'은 헌법을 제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제헌 국회는 헌법을 제정하는 국회였습니다. 정부가 구성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바로 헌법입니다. 헌법이 있어야만 그 헌법에 명시된 정부의 정체성과 정치 체제 등에 따라 정부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헌 국회 의원들은 국회를 열자마자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광복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계승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영국의 입헌 군주제와 미국의 대통령제 중 우리나라 현실에 적합한 체제를 본받자는 의견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제헌 국회 의원들은 우리나라는 과거 어떤 나라였으며, 앞으로 어떤 나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48년 7월 12일에 드디어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 17일에 공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이 등장한 겁니다.
헌법에서는 새롭게 세워진 국가의 공식적인 명칭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제1조와 제2조를 통해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헌법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 제도를 대통령제로 규정하고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항에 따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선출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광복 3주년이 되던 이날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식이 치러졌습니다.
나 이승만은 국가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호하는 대통령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언합니다.
광복 이후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했다는 점에서의 한계도 지니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후 1948년 12월에 열린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습니다.
한편 38도선 이북의 북한은 1948년 9월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처럼 한반도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는 40여 년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도 불가하고 결국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는 분단의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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