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청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2.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를 통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소 공동 위원회는 최대 5년 기한으로 미·영·중·소 4개국 신탁 통치하는 내용을 임시 민주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해야 한다.
이것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발표되었습니다. 처음에 알려졌던 것과 달리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과 미·소 공동 위원회의 개최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신탁 통치는 최대 5년이며 임시 민주 정부와 협의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오늘날처럼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한 번 신탁 통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나자 회의의 상세한 결정 사항이 공개되었는데도 사회적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는 신탁 통치에 반대했습니다. 이제 겨우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는데 식민 지배나 다름없는 신탁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좌익 세력이 태도의 변화를 보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소식이 처음 알려졌을 때까지만 해도 신탁 통치를 반대했던 좌익 세력이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겁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바꾼 것입니다. 좌익 세력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핵심이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이며, 한반도에 통일 정부가 수립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독립과 신탁 통치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을 촉진하고 보장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우익 세력은 이들의 태도를 크게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허울 좋은 임시 민주 정부 수립에 현혹되어 신탁 통치의 본질은 보지 못한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좌익 세력이 민족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소련의 지령만 쫓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심화하던 것과 별개로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46년 3월에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자유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소련은 한반도에 어떤 성향의 정부가 세워질 것인가를 놓고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미·소 공동 위원회의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임시 민주 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미국과 소련 모두 서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당시 미국과 소련 대표의 대화입니다.
소련: "아무 정당이나 사회단체를 참여시키는 것은 혼란만 가중할 뿐이오. 임시 민주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기본적으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을 지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해야 하오."
미국: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를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는 모두 공산주의 세력이잖소? 임시 민주 정부를 공산주의 세력으로만 구성하자는 것이오? 절대 동의할 수 없소."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미·소 공동 위원회는 미국과 소련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별다른 결실도 얻지 못한 채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습니다.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 사이의 신탁 통치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그러자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승만이 나섰습니다. 그해 6월에 이승만은 정읍에서 국민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었습니다. 언제 다시 열릴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우리의 바람도 뜻대로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서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물러가도록 세계 여론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남북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당시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승만은 이후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펼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민족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행동을 크게 우려하는 한편, 다양한 입장으로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이승만의 주장을 옹호하며 소련은 한반도의 공산화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쪽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가는 북한에서도 정부를 수립해 두 개의 정부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습니다.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며 하나의 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이들에게 이승만의 발언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이처럼 통일 정부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 민족은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습니다. 강대국들의 대결 구도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데다가 우리 민족 내부에서도 입장의 차이를 좁히지 못해 통일 정부로 향하는 배는 방향을 잃고 떠돌고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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