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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조선에 끼친 영향

by 짬도이거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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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다른 나라와의 연속된 전쟁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일본, 명나라 모두 피해를 보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국토가 전쟁터로 사용되어 황폐해진 조선이었습니다. 인구가 크게 줄고, 토지는 황폐해진 데다 토지 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사라져 국가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불국사와 경복궁 등의 귀중한 건축물이 불에 타고,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가 하면 일본으로 잡혀간 수만 명의 포로 중 일부는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 가기도 했습니다.
일본 역시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며 많은 군사와 물자를 투입했지만, 애초의 목표였던 명나라의 정벌은커녕 조선의 영토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항복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문화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활자와 그림, 서적 등을 빼앗고, 학식이 높은 선비들과 우수한 인쇄 기술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또한 도자기 도공을 끌고 가 일본의 도자기 제조 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류는 중단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새로운 정부인 에도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선에 다시 국교를 요청해 왔습니다. 에도 막부는 사절단의 교류를 통해 조선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조선으로부터 새 막부의 권위를 인정받아 이를 백성들에게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의 사정을 먼저 알아보고 전쟁 때 끌려간 포로들도 데려올 겸 사절단을 보내 1607년부터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했습니다.
이때 일본으로 파견된 외교 사절단을 통신사라고 합니다. 200여 년 동안 총 12차례에 걸쳐 파견되었습니다. 파견될 때마다 300~500여 명의 인원이 6~12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렀는데, 일본은 통신사 일행을 매우 극진히 대접했다고 합니다. 사절단에는 조정의 관리부터 통역관, 문인, 화원, 의원, 호위 군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811년에 마지막 교류가 이루어질 때까지, 통신사는 양국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피해는 왜란만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끝이 났고, 전투 역시 일부 지역에서만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군대가 거쳐 간 한반도의 서북 지방은 약탈과 살육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1000만 명이던 조선의 인구 중, 무려 50만 명이 청나라로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으로 생긴 용어로 요즘도 쓰이는 '환향녀'와 '호래자식'이 있습니다. 환향녀는 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 여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여인들은 오랑캐에게 능욕당한 부정한 여자로 여겨지며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환향녀에게서 태어난 자식 또한 호래자식이라 불리며 무시당했는데, 이는 아비 없는 오랑캐의 자식이란 뜻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환향녀와 호래자식은 이처럼 우리 역사의 아픔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평소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에게 패했다는 사실은 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국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권위도 추락했습니다. 치욕과 분노로 들썩이던 조선의 분위기는 급기야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정벌하려는 쪽으로 흘렀지만 결국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호란이 끝난 뒤, 조선은 청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청나라는 책봉으로서 조선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조공 책봉 관계는 전쟁을 통해 수립된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수시로 사신을 파견했고, 조선 역시 이에 응해 사신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청나라에 사대 외교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선의 반발심이 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양국의 관계는 점차 안정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에 간 사신이라는 의미로 연행사라 불렸던 조선 사절단은,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부터 1894년까지 무려 507회나 파견되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연경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해서 임무 수행 중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연행사 일행은 새로운 문물을 살피고 청나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조선의 경제 문화적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한편 전쟁이 남긴 상처와 피해는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했습니다. 임진왜란 중 조선 정부는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을 다루는 포수와 창검을 다루는 살수, 활을 쏘는 사수로 구성된 직업 군인을 배치했습니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몇 년에 한 번씩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이 전부였던 이전의 군사 제도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청나라에 대항하는 과정을 거치며 군사 제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총융청을 설치해 경기 지역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게 하는 한편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어청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를 지키는 어영청을 설치하고, 후에 금위영까지 추가로 마련해 서울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들 역시 직업 군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의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우수성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고,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문에 인조가 청나라의 황제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추는 등의 치욕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의 군사력을 재정비하게 되었다는 점과 연행사를 통해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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