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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by 짬도이거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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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은 많은 손해를 입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토지 곳곳이 황폐해져 제대로 농사지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608년에 선조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전쟁 후의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왕조의 교체가 일어날 정도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명나라와 조선이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틈을 타, 1616년에 여진족은 만주 지방에 후금을 건국했습니다. 쇠퇴하고 있으나 여전히 강한 명나라와 성장하고 있으나 완전하지 않은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은 매우 신중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은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차일피일 출병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와 조선은 명분상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출병을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고민 끝에 강홍립과 그의 군대를 명나라 지원군으로 보내며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라는 명령을 몰래 내렸습니다. 명나라와 후금 중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기 위해 교묘한 중립 외교를 펼친 것입니다.

전쟁에 나선 강홍립은 여진군에게 "우리나라가 너희들과 본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겠느냐. 지금 여기 들어온 것은 부득이한 것임을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광해군의 의중을 파악한 강홍립은 조선이 어쩔 수 없이 명나라의 원군이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며 후금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 외교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신하들은 명나라를 배신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난했습니다. 이후 조선의 외교 정책은 명나라의 편에 서서 후금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조선의 새로운 외교 정책이 후금을 자극하던 중 마침 조선에서 일어난 이괄의 난은 후금에 조선을 침략할 구실을 제공했습니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공신이었지만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반란군 중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쳐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앞세워 1627년에 조선을 공격했습니다. 정묘호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후금군이 남쪽으로 진격해 오자 조선 각지에서 관군과 의병이 일어나 대항했습니다. 인조 역시 강화도로 피신해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군사 작전을 지원할 보급로가 끊기고 병력이 부족해지자 후금 쪽에서 먼저 강화를 제의했습니다. 강화의 조건은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를 쓰지 말 것과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이었습니다.
그 결과 양측은 후금군이 즉시 철병할 것, 양국이 형제국이 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선으로 정묘호란을 마무리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세력을 점점 더 키우더니, 1636년에는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쳤습니다. 이후 청나라는 자신들의 통치자를 황제라 칭하며 명나라와 대등함을 과시하는 한편 조선에 늘 신하의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던 조선의 신하들은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싸우자며 주전론을 내세웠습니다. 그러자 청나라의 강대함을 인정하고 외교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주화론 편의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조정의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다시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1636년 12월에 청나라의 태종이 직접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합니다. 청나라의 군대는 압록강을 넘은 지 불과 5일 만에 한양에 다다랐고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했습니다. 왕족과 일부 관리들은 미리 강화도로 피난을 갔지만 인조는 청나라 군대 때문에 길이 막혀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인조와 주전파 관료들은 청나라에 대항해 싸울 방안을 모색했으나,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3000명의 군인과 50일 치의 식량만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신하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강화도가 청나라의 수중에 떨어지며 왕자와 비빈이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1637년 1월에 인조는 45일간의 농성을 멈추고 삼전도에 있던 청나라 진영으로 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황제를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굴욕스러운 항복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는 공식적으로 끊어졌고 두 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북벌론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북벌'은 '북쪽의 청나라를 정벌한다'라는 뜻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조선인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효종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고쳐 쌓고 군대 양성에 힘을 쏟으며 북벌을 추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국력이 나날이 강성해진 데다 효종이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북벌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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