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었다가 1920년대 후반 이후 그 활동이 침체하였습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기관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던 만큼 쉽게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김구는 세력이 약화한 임시 정부를 끝까지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독립 자금도 거의 지원이 끊겨 집세도 못 낼 정도로 처지가 악화하였지만 김구는 임시 정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소의 인원과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김구는 고민 끝에 의열 투쟁을 펼치기로 했고 한인 애국단이라는 의열 투쟁 단체를 만들고 이를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인 애국단의 의거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봉창의 의거와 윤봉길의 의거입니다.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 돌아가는 일본 천황의 행렬이 나타나자 군중 속에서 한 남자가 달려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천황이 탄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천황이 탄 마차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한 데다 거리가 너무 멀어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천황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폭발로 그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폭탄을 던진 남자가 품 안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며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도망가기는커녕 당당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남자는 곧바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이었습니다. 이봉창은 일본 경찰을 향해 “나는 한인 애국단원으로, 단의 사명을 받들어 왜의 임금을 암살하려고 왔을 뿐이다.”라고 폭탄을 던진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심문에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심문할 때마다 오히려 “나는 너희들의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인데 너희 쥐새끼 같은 놈들이 왜 나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것이냐!”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이봉창은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일제의 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런데 이봉창의 의거는 예상치 못한 데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중국의 각 신문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천황이 불행히 맞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이봉창이 천황을 제거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낸 겁니다. 당시 중국은 일제가 일으킨 만주 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매우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봉창의 의거 소식이 들리자 크게 공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이 사건을 자국에 유리하게 이용했습니다.
당시 만주 사변에 대한 국제적 여론이 악화하자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고 싶었던 일제는 중국의 반일 태도를 트집 잡아 중국의 신문사들을 공격하고 군대를 동원해 상하이를 침략했습니다. 그러고는 1932년 4월 29일, 천황의 생일인 일왕 생일을 맞아 훙커우 공원에서 상하이 점령 축하 기념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김구와 눈물로 작별한 윤봉길은 그 길로 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폭탄이 장치된 군용 물병과 도시락이 들려 있었습니다. 윤봉길은 힘차게 폭탄을 던졌고, 이 폭탄으로 인해 일본군 육군 대장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그 밖의 일본 고위 관료 여러 명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쟁의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일제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윤봉길은 현장에서 잡혀 그해 12월에 일본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 용사가 단행했다.’라며 윤봉길의 의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중국인들은 이 의거에 큰 감동을 받고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우리 민족이 중국 영토 내에서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습니다. 이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이루어 낸 커다란 성과였습니다.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어요.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어요.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윤봉길이 의거를 앞두고 어린 자식들과 고향의 가족 및 동포에게 남긴 유서입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부모님의 아들로서 평범한 사람이었던 윤봉길은 험난한 시대 상황 속에서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영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1931년에 일제가 만주 일대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에서 독립군이 활동하는 데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이 우리 민족의 무장 독립 투쟁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자, 독립군은 중국군과 손을 잡고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을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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