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나라 역사

고려말의 혼란기와 신진사대부의 성장

by 짬도이거 2022. 8. 12.
반응형

14세기 중반이 되자 몽골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중 한산동을 두목으로 삼고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다니던 도적의 무리를 홍건적 또는 홍두적이라고 불렀습니다. 홍건적은 세력을 빠르게 확대하며 중국 각지에서 원나라 정부와 전투를 벌였는데, 그들 중 한 무리가 원나라의 공격을 피해 고려로 넘어오면서 홍건적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홍건적은 크게 두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1359년에 있었던 1차 침입 때는 4만명의 무리가 쳐들어와 평북 의주와 정주를 함락하고 순식간에 평양까지 점령했습니다. 이에 고려 정부는 군사를 보내 이들을 물리치고 평양을 탈환했습니다. 이때 고려군은 도망치는 홍건적을 끝까지 추격해 압록강을 넘어 살아 돌아간 홍건적이 수백 명에 불과할 정도로 섬멸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침범해 노략질을 일삼던 홍건적은 1361년 10월에 2차 침입을 시도했습니다. 무려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홍건적이 순식간에 개경까지 밀고 내려오자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은 수도를 버리고 안동까지 피신했습니다. 그해 11월에 개경이 홍건적의 손에 넘어가면서 큰 위기에 봉착한 고려는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이듬해 1월이 되자 최영,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개경을 포위했습니다. 방심하고 있던 홍건적 무리는 우왕좌왕하다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성계가 적장의 목을 베면서 고려는 개경을 탈환했습니다.

고려 말에는 홍건적뿐만 아니라 왜구까지 수시로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왜구는 삼국 시대 때부터 한반도를 침입했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이 되자 지속적으로 침입하며 약탈을 시행했습니다. 고려는 왜구 때문에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습니다. 왜구는 공민왕 때부터 41년간 총 506회, 평균 1년에 12회 이상 고려에 침입했다고 합니다.

개혁 정책의 실패 후 공민왕이 암살당하면서 우왕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고려의 정치적 혼란은 곧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고려 정부는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곡식을 약탈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고려의 조운선을 덮치고 연안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습니다. 이에 고려 정부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회유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별 성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왜구에게 강경하게 맞서기로 했습니다. 성을 쌓고 수군을 강화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인 화포를 개발했습니다. 국방력을 강화해 왜구를 토벌하기로 한 겁니다.
최영과 이성계가 주요 인물로 이 시기에 이들은 빈번히 침략하던 왜구를 물리치고 명성과 권력을 얻었습니다.  
최영은 홍산 대첩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1376년에 최영은 61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적군과 맞서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다 숨어 있던 왜구가 쏜 화살에 맞아 최영의 입술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영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더욱 용맹스럽게 싸워 결국 적을 섬멸했습니다. 
또한 이성계의 활 솜씨는 1378년에 있었던 황산 대첩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당시 왜구의 적장이었던 아지발도는 15~16세가량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용맹해 고려 군사들이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얼굴까지 모두 갑옷으로 가려 빈틈이 보이지 않았던 아지발도를 향해 이성계가 활을 쏘았습니다. 활은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명중시켰습니다. 투구가 떨어지자 이성계는 그 틈에 얼굴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고 지휘관을 잃은 왜군은 기세가 꺾여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최영과 이성계는 무장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정치적 위상을 높여 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입장이 엇갈리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고려 말이 되자 신진 사대부는 조선 왕조의 건국을 둘러싸고 정치적 행보를 서로 달리했습니다. 고려 왕조를 유지한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자는 온건파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급진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했습니다.
정도전, 조준 등은 급진파 사대부로, 전면적인 토지 개혁과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했습니다. 폐가입진은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급진파 사대부들은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 말하며 우왕은 물론 그의 아들 창왕 역시 거짓 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끝내 창왕을 폐위하고, 고려의 20대 왕인 신종의 7대손 왕요를 공양왕으로 세웠는데 후에는 조선을 건국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웁니다.
한편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 대부분의 신진 사대부들은 온건파 사대부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새 나라의 건국을 반대했습니다.

온건파 사대부와 급진파 사대부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성리학적 질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군신 간의 관계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차이를 보였습니다. 급진파 사대부는 성리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하면서 절대적 군주관을 비판했습니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맞아야만 정통성을 가지며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명분론에 따라 급진파 사대부는 명분에 맞지 않는 우왕과 창왕 그리고 고려를 부정했습니다. 반면 온건파 사대부의 대부분은 절대적 군주관을 옹호했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절대 불변의 관계이므로 영원하며 변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인식 덕분에 이들은 끝까지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며 충신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

'우리나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훈구파vs사림파  (0) 2022.08.13
조선의 건국 과정  (0) 2022.08.13
공민왕의 개혁  (0) 2022.08.12
원나라의 내정 간섭과 몽고풍  (0) 2022.08.12
몽골의 침략과 고려의 항복  (0) 2022.08.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