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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고려 무신들의 정변

by 짬도이거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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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년 어느 날 고려의 한 절에서는 분노에 찬 고함과 겁에 질린 처참한 비명이 들렸습니다. 
바로 무신들의 정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신들은 왜 정변을 일으킨 것일까요.?

 

본래 고려에서는 무신과 문신이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신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면서 전시과 지급이나 승진 등에서 문신이 무신보다 우대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로 인해 문신은 자연스럽게 무신들을 자신들의 아랫사람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자리 잡다 보니 문신이 무신보다 더 대우받게 되고 높은 사람처럼 여겨지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처럼 문신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고 무신이 차별받았던 것은 무신이 문신과 비교하면 출신 신분이 낮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좋은 가문 출신인 문신에 비해 무신은 평민 출신이 많았습니다.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전에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모여 철저하게 논의하고 정중부가 이에 동조하면서 이루어진,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무신들이 반란을 모의한 직접적인 이유는 무신에 대한 차별 대우였습니다. 여기에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 역시 평민 출신이었고, 이의민은 천민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무신들은 문신은 물론 환관에게까지 모욕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같은 관료라 하더라도 출신 신분이 낮은 무신들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그을리며 모욕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모욕을 견디며 참아 온 무신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문신을 향해 복수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자겸의 난이나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 여러 변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성장한 덕분에 체계적으로 정변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정변 당일에도 문신들의 무신 무시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종에 이어 고려의 왕이 된 의종은 개경 근처에 있는 보현원이라는 절에 가는 도중, 무신들에게 수박희를 시켰습니다. 수박희는 주로 손을 써서 공격하는 무예로, 군사 훈련을 겸한 전통 무예입니다. 이때 대장군인 이소응이 젊은 장수와 수박희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환관인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모습을 본 정중부는 크게 노하며 소리쳤습니다. "이소응은 비록 무인이지만 벼슬이 3품인데 어찌 환관이 모욕할 수 있는가"
한뢰의 벼슬은 이소응보다 낮은 5품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무신들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립니다. 무신들은 왕의 행렬이 보현원 근처에 다다르자 한뢰를 포함한 여러 환관과 문신을 살해했습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정중부는 개경으로도 군사를 보내 그곳에 있던 문신 관료 50여 명을 더 살해합니다.

사실 무신에 대한 차별 대우는 무신 정변의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동안 쌓여 온 고려 사회의 정치적 모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서도 드러나듯이 고려 사회는 소수의 문벌 귀족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폐쇄적인 구조인데다가 왕권이 강력하지 못해 정치적인 권력다툼도 심했습니다.
무신들은 평소 앙심을 품었던 문신은 물론, 관계없는 문신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여기에 하급 무신과 일반 군인들까지 동참하면서 상황은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태로 이르렀습니다. 무신 정변을 성공시키고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데에는 하급 무신들의 적극적인 동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신들을 처단하고 권력을 장악한 무신 세력은 의종과 태자를 각각 거제도와 진도로 유배 보내고 왕의 동생인 명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명종은 실권을 차지한 무신들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왕에 불과했습니다. 

무신 정권이 들어서자 문신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동북면 병마사를 지내던 문신 김보당이 무신들을 내쫒고 의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문신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목숨을 잃은 문신의 수가 무신 정변 때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김보당이 죽기 직전에 문신들 중 공모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수많은 문신 관료들이 처형당한 겁니다. 이후 중앙 관직은 물론 지방 관직에 이르기까지 문신 관료 대신 무신 관료가 배치되었습니다. 무신의 기반은 갈수록 강화됐지만, 문신의 정치적 지위는 계속 약화하였습니다. 

한편 유배된 의종은 무신들이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대부분의 무신이 의종에 관한 처리를 주저하고 있을 때 이의민이 나섰습니다. 이의민이 군사들과 함께 다가오자,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의종은 이의민에게 부탁했습니다.

"나는 한 나라의 왕이니 죽음도 의연하게 맞이하고 싶구나"

의종은 이의민에게 술을 한 잔 청했습니다. 독을 탄 술을 먹으며 고통 없이 죽기를 바라는 뜻에서 술을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종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외면한 것인지 이의민은 술에 독을 넣지 않았습니다. 대신 의종을 번쩍 들어 척추를 꺾고, 그 시체를 연못에 그대로 던져 버리는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의종을 살해했습니다. 아무리 왕권이 약한 쫒겨난 왕이라지만 너무나 처참한 최후였습니다. 

이로써 직전의 왕이었던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정중부, 이의방, 이고를 필두로 한 본격적인 무신들의 정권이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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